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기 위해: 영화 <목화솜 피는 날>
자주 쓰지 않는 노란 우산이 하나 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적힌 그 우산은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뜻으로 제작됐고 전국 각지에서 우산을 든 사람들이 모여 잊지 않고 행동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하지만 정작 비 오는 날이면 나는 다른 우산을 쓰곤 했다. 너무 눈에 띄는 건 아닐까, 누군가와 시비가 붙지는 않을까, 신경이 쓰였다. 잊고 살면서 잊지 않겠다는 우산을 쓰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10년 전인 2014년 4월 16일, 진도에서 제주도로 향하던 세월호가 침몰했다.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 325명을 포함해 476명이 타고 있던 배가 속수무책으로 가라앉았다. 사망자는 304명, 대부분 선실에 있으라는 지시에 순종했던 고등학생들이었다. 그날, 사무실에서 일하던 나는 동료들과 뉴스를 보며 무심한 잡담을 나눴다. 제주도로 가던 배가 사고 났대. 거의 구출됐나 본데? 어쩌나, 수학여행은 망했구나. 그 뒤로 참담한 뉴스가 숱하게 쏟아졌지만, 내가 가장 또렷하게 기억하는 건 그 말들이다. 아무렇지 않게 책상 너머로 오가던 일상의 언어들이다.
그리고 10년이 흐르는 사이, 누군가의 일상은 사라졌다. 누군가는 절망 속에 살았고, 누군가는 그 절망을 기억하려 했고, 누군가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려 했다. 그중 몇몇은 영화를 만들었다. 설경구와 전도연이 출연한 <생일>은 그날 떠난 아들의 빈자리를 끌어안고 사는 가족들의 이야기다. 아들은 이미 없지만 아들의 생일은 다가온다. 축하받을 사람은 없는데, 축하하고 싶은 마음은 어쩌면 좋을까.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도 아직 떠나지 못한 영혼들을 담은 <눈꺼풀>도 있다. 저승과 이승의 경계, 그곳에 오기엔 한참 이른 아이들을 고이 보내주고 싶은 애가가 있다. 몇 편의 다큐멘터리가 나온 끝에 올해는 유가족인 문종택 감독의 <바람의 세월>이 공개됐다. 세상이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를 직접 남길 수밖에 없었던 ‘지성이 아빠’의 기록이다.
며칠 전 영화 <목화솜 피는 날>을 봤다. 딸을 잃은 아빠는 기억마저 잃은 채로 딸을 삼킨 바다 곁을 맴돈다. 한때는 마음을 나눴던 다른 부모들의 웃음도, 생면부지 남이었으나 그 자리에 함께해 주었던 타인들의 손길도, 이제 그에겐 의미가 없다. 서로 보듬었고 다투었으며 아끼고 미워했던 사람들, 사랑을 잃고 뒤에 남겨진 사람들. 경은이 아빠는 그 모든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까. 잊지 않겠다던 그 많은 이의 다짐은 부끄럽지 않은 약속이 될 수 있을까.
English Translation: cultureflipper.com/blog/when-we-bloom-again-en